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세요?

제가 아직 해외에 살고 있는 줄로 알고 계신 분도 있고, 그냥 사라졌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네요. 많은 사람들이 서른 즈음에 그러는 것 처럼요. 또 그 다음 구간에서는 50%가 사라지겠죠. 1%가 남을 때까지요. 제가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려나요?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테크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미술계에서 하던 일을 넓히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아이디어를 결과물로 만들어 내고, 추상적이고 모호한 계획을 실제 프로젝트로 실현하는 본질은 같다고 생각해요. 제가 왜 미술계가 아닌 다른 곳에 도전하려 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드리려고 합니다.

2018년, 한 전시 프로덕션을 맡았을 때 저는 벼랑 끝에 있었어요. 일하다가 금니가 빠졌는데 치과를 갈 시간도 돈도 건강보험도 없었어요. 전시 제작비를 카드로 긁었더니 허덕이게 되더라고요. 필요해서 제 이름으로 전시기획 제작사 법인을 세웠는데, 이것 때문에 오히려 이용당하기 좋은 취약한 상태가 되었고요. 항상 그랬듯이 수익이 불안정 할 땐 N잡으로 풀칠하고 살았으니 괜찮은 줄 알았는 데 아니었어요. 일을 더 해서 갚을 수 없는 부채가 생기고, 생활이 힘들어지고, 몸과 마음이 아프니까 불가능하더라고요. 번역, 통역, 코디네이터, 정산 및 보고서 업무 등 따질 새도 없이 정신 없이 일을 받기도 했고요, 레스토랑이랑 호프집에서 알바도 해봤어요. 본업인 미술 프로듀서 일에 생계를 위한 알바 일정을 끼어 맞추려다 보니까 꾸준히 일자리를 유지하기 쉽지 않았어요.

저는 미술계 동향에 둔하고 눈치가 없는 성격이라(는 것도 최근에 알았습니다) 공간을 연다거나, 기획을 계속하는 흐름을 따를 엄두를 내지 못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미술일의 작은 조각이라도 받았을 때 ‘나도 한 몫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거절할 깜냥도 없었고,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하다 보니 이제 다른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도 못했어요. 다만 국내외 미술 프로젝트 진행이 거듭될수록 제가 가진 능력이 몇 년을 쌓아도 아직도 부족하기만 해서 시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구에게나 즉각 응답하고 잡일을 하는 알바/비정규직으로 기능하는 제 노동의 가치가 미술계에서 전혀 커리어의 방향성을 획득하지 못해 주변적이라는 제 신세는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왜 그런가 하니 부끄럽게도 직업에는 세 가지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 대학시절부터 쌓인 획일화된 미술계 전문가에 대한 정의, 손에 꼽을 수 있는 선택지에 정신이 쏠려서 그런것 같아요. 국공립 기관이나 사립 미술관, 또는 독립기획자로 활동하는 큐레이터로서의 삶이요. 전문사 졸업도 해야하지, 여력이 되면 해외 박사까지 가고 싶은 욕심도 들고, 오프닝 행사나 사람들을 만날 때 멋도 부리고 싶고, 베니스나 카셀에 전시보러 여행 다니고 싶었어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지금 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겉만 쫓아서 둥둥 떠다녔습니다. ‘노-력’하다 보면, 큐레이터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지금와서 보면 이상해요.

전시를 기획하고 싶으면 전시를 기획해야지, 해외 작가나 대형 전시 코디를 계속 반복한다고 큐레이터가 될 기회가 생기는 건 아닌데 말이죠. ‘앞으로 혜진씨 일에 도움이 될거야. 이런 경력은 있어야지.’ 반복되는 그 달콤한 말을 곧이 그대로 믿은 것 같아요. 그 와중에 비극적이게도 일이랑 잘 맞았어요. 국내외 문화예술계 기관과 작가와 일을 할 수 있고, 로지스틱스와 대형 설치물 제작 프로젝트를 관리할 수 있는 외국어 실력과 커뮤니케이션 스킬, 그리고 다양한 산업과 전문가를 섭외하고 협상 기술이 저의 강점이라고 생각했죠. 새로운 사람, 새로운 기관, 새로운 형태의 작품과 전시를 하면서 전세계와 이어져 있다는 짜릿함에 중독 되더라구요. 그냥 뭔가 모호하고 아이디어로만 있었던 기획이 구체화되고 도록이나 워크숍 같은 형태로 변주되어 관객과 만날 때까지 붙어 있으면서 재미있었어요. 수많은 이해관계자를 설득하고, 빠듯한 예산과 일정, 물리적인 한계 상황에서 이리저리 굴려서 되게 만드는, 마법 같은 '프로덕션'일이 적성이라고 생각했죠.

이상한 건, 프로덕션은 미술계 전문가가 아니라는 거에요. 미술계는 보통 코디네이터나 프로젝트 매니저는 직업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일컫는 임시직이고, '진짜' 큐레이터나 비평가가 되기 전에 거치는 과도기 정도로 많이 인식을 하잖아요. 이 직군에 종사하는 저부터가 고정관념을 깨고 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지금은 제가 '되다 만' 사람, 끝까지 '못 버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저를 코디라고 부르면 꿋꿋이 프로듀서라고 말하며 명함을 드리고 다녔어요. 전 프로듀서도 충분히 직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실제로 봤어요. 한국에서 롤모델이 없었을 뿐.

<문화예술 사회적경제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2018년도 기준 주요 사업태 57.2%가 전시 기획 및 제작이에요. 프로듀서 등 세부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 받는 전문가나 회사가 얼마나 될까요? 사업 개발, 시장 개발, 고객 개발 없이 대부분 문화예술진흥기금이나 문화재단 지원금을 수령해서 여러 미술관의 기획, 제작 업무를 대행하는 사업체가 대부분입니다. 사업신고가 필요한 1인 기업가가 대부분일 거에요. 저도 전시 프로덕션에 계속 일을 하려면 필요해서 덜컥 대표가 되었어요. 계약상 책임을 물기 좋은 '알바' 신분이어서 어쩔 땐 ‘대표’ 아니면 ‘혜진씨’, ‘코디’로 돌아갔죠. 4대 보험, 근로기준, 복지는 하나도 안지켜도 되고 '결과물'만 독촉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이나 고용주가 아니라, 클라이언트가 됐어요. 여러 사람 사이에서 조율하고 한정된 자산으로 운용해야 하는 업무는 그대로인데, 세금의 의무와 리스크는 제가 책임지는 대표가 되었어요.

제가 전문 프로듀서들과 회사를 창업하고 싶다고 했을 때, 모 선생님이 물정을 몰라 안타깝다는 듯이 조언도 해주셨죠. "혜진씨, 작가들이나 미대생들이 알바로 다 하는데... 뭣하러 회사를 만들어?" 그러고 보니 생각나요. 예산상의 문제로 제 월급은 한 달 100만원에서 10만원으로 줄여야, 영상 제작을 도와준 작가분에게 400만원을 줄 수 있다며 사전 동의 없이 임금을 바꿨던 분이요. 전시 프로덕션 계약을 하려는데, 세금까지 예산안에 촘촘하게 넣은 뒤에 '전시 전엔 안 바쁘니까 월급은 30만원으로 하면 되겠네.'라는 불합리한 절충안을 종용한다든지. 애초에 수익 구조가 없고, 예산을 세금 처리해주는 법인만 제 명의로 넣는 건데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겠어요? 길게는 2년 동안 해야하고 그동안 문진금 시스템에 몇 번이나 바뀔 정산과 보고 과정을 거치고, 청문회에 불려갈 수도 있는데, 전시 설치 기간을 제외하고 월 30만원 수고비로 퉁치자고 하니까 전 돌덩이로 맞은 기분이었어요. “이 일을 계속 해도 되는가?” “이 일이 정상인가?”

문제를 제기할 새도 없이, 제가 안한다고 하면 할 사람이 널렸어요. 일을 할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순진하게 세무서 가서 종이 한장 낸 회사, 결국 폐업신고 했어요. 아무런 자본 없이, 돈을 벌 계획 없이, 풀고자 하는 문제의식 없이 명함만 팠던 제가 부끄러워요. 전 지금, 여기 해야 할 일.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일을 생각해보려고요. 5년 안에 풀어야할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테크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기술이 가진 임팩트를 목격하고, ‘서비스’와 시장, 고객을 이해하는 여러 프레임워크를 접하면서 미술계라는 생태계에서 얼마나 좁은 시선으로 우리 일을 폄하했는지 마음이 아팠어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 알랭 드 보통

저는 기관에 소속되는 것 처럼 세상이 직업이라고 인정하는 일을 저도 자연스레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정작 제가 하고 있는 일은 과도기의 비전문적이고 보조적인 일로 생각하면서요.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다고 말했지만 싫은 것은 일 자체보다 일이 놓인 조건이에요. 예를 들면, 제가 하는 일은 미술 대학을 졸업하거나 영어를 할 수 있고, 시급에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로도 대체될 수 있다는 고질적인 인식이요. 정확히 어떤 부분이 싫은지 연구하고, 다르게 일하기 위해서 테크 스타트업으로 옮겨서 일을 해봤어요. 블랙박스로 남아 있던 2018년까지 제가 했던 미술일을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다른 시선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들’의 조합이 무엇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말과 글로 옮겨보면서 힘을 얻고 있어요.

<우리의 일에 대하여>를 위해 작업실 테이블에서 우리 일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내내 심장이 쿵쾅거리고 목이 매였어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달라지고 싶어서, 너무나 달라지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세미나 세션이 끝날 때마다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생각이 마구 떠올라요. 계속 미술일을 하고 싶은, 그러나 미술계는 떠나고 싶은 욕망을 이해하고 긍정할 수 있게 되었어요. 우리, 자신의 욕망에 노력과 정성을 들입시다.

김혜진 드림